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문단 편집) == 생애 == [[1922년]] [[3월 5일]]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로 알베르토 파졸리니는 고위 파시스트당원이었고 어머니 수산나 콜루시는 농민 집안 출신의 교사였다. 이런 계급 차이 때문에 아버지는 파졸리니를 아들로서 대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아내로 여기지도 않으면서 무시했다. 덕분에 어머니가 파졸리니를 홀로 돌봐야 해서 파졸리니는 아버지가 병사하자 무척 기뻐했을 만큼 아버지를 극도로 혐오했다. 그래서 파졸리니가 감독한 여러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파시즘]]의 모순을 비판하는 메세지를 담고있다. 그러나 어머니한테는 엄청난 효자였고 사이도 좋아서 어머니는 파졸리니가 만든 영화에서 열연하기도 했다. 귀도라는 세 살 아래 동생이 있었지만 1944년 [[살로 공화국]]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살해당했다. 파졸리니는 동생의 죽음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1940년]] 볼로냐 대학교에 입학하여 예술사를 전공하고 20세에 [[시집]] [[카사르사의 노래]]를 발표해 미래의 문학인으로 주목받았으며 지역 공산당 조직에 가입하기도 했으나 [[1949년]] 집단 동성애 혐의로 추방당해 가족들과 함께 로마로 이주했다. 이후 파졸리니는 로마에서 교사로 일하며 빈민가 사람들의 생활을 관찰해 내놓은 [[거리의 아이들]]과 [[폭력적인 삶]]이라는 소설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다. [[1961년]]에는 영화 감독 데뷔작이자 뒷골목 포주들 이야기를 다룬 [[아카토네]]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문제적 감독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파졸리니가 감독한 영화들의 일관된 파격성으로 정치적 문제를 포함해 수많은 논쟁을 환기해서 그는 수차례 감옥에 들락거렸다. 의외로 흥행 실적은 나쁘지 않았는데 특히 [[데카메론]]은 당시에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가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우파들은 "그의 영화들에는 언제나 타락한 사람들이 중심을 이룬다."고 비난했고, 좌파들은 "그의 영화가 대중들에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위험한 인식을 줄 수 있다."며 우려했지만 파졸리니가 이탈리아 사회의 여러 모순을 뿌리깊게 관찰하고 자신만의 시적 리얼리즘이라 명명한 예술방식은 지금까지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Edipo Re, [[1967년]])은 프로이트적 해석과 자전적인 요소- 상술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 어머니에 대한 사랑, 혹은 어쩌면 욕망- 를 가미하여 신화를 변주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원작의 오이디푸스가 진리 추구, 자아 발견에 대한 열의를 결코 꺾지 않고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파졸리니 영화에서의 오이디푸스는 무의식적으로 이미 깨달은 것에 대한 의식적인 거부를 표하는 인간의 심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이디푸스 역의 프랑코 치티와 그를 보좌하는 광대 역의 니네토 다볼리는 파졸리니의 영화에 여러 번 참여했으며 특히 다볼리는 파졸리니가 연인으로 생각했지만 [[1971년]]에 여자친구와 결혼한다고 말해서 파졸리니가 상당히 실망했다고 한다. [[1975년]] 유작 [[살로 소돔의 120일]][*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성으로 국가 대부분에서 상영 금지를 먹은 악명 높은 영화이다. [[80년대]] 국내에서 상영회를 했을때 여대생들이 영화를 보다 뛰쳐나와 집단으로 구토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을 남기고 [[11월 2일]] 오스티아 해변에서 17세 소년 주세페 펠로시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살해 현장에 난 많은 발자국과 여러 차량 자국, 여러 증언 들로 말미암아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사실 파졸리니는 우익이나 보수층을 적나라하게 까기도 했지만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냉전 당시 네오파시즘과 신자본주의의 팽창을 우려하는 글을 신문에 개재하곤 해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워낙에 적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용의자도 엄청났다. 경찰 측에서 지어낸 시나리오도 치밀했는데 용의자인 소년이 동성애 상대였고 파졸리니가 변태적인 성행위를 강요하여 살해했다. 이때 소년은 파졸리니의 지갑을 슬쩍했으며 마을로 도망친 소년의 입을 통해 파졸리니의 동성애 짓이 소문나자 격분한 마을 청년들이 시체를 두들겨 패고 소년이 차로 후진해서 얼굴을 뭉갰다는 각본이 준비되어 있었다. 경찰은 사건 현장의 증거 인멸에만 급급했고 급기야는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파졸리니를 지지하는 몇 사람이 경찰에게 덤벼들면서 반발하기까지 했다. 파졸리니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인 파졸리니가 누군가에게 살해되고 권력으로 은폐됐다고 죽을 때까지 비난했으며 파졸리니를 지지하는 소수도 시위하면서 재조사를 거듭 촉구했지만 [[1998년]] 이탈리아 측은 파졸리니가 살해된 사건을 미해결로 마무리했다. [[2000년대]]에 와서 범인으로 잡혔다는 주세페 펠로시는 당시 억지로 거짓 자백한 것이지 나는 파졸리니를 죽이지 않았다고 고백하면서 시칠리아 억양을 쓰는 남성 3명이 파졸리니를 죽였다고 밝혔다. 이후 주세페 펠로시는 각종 방송과 책을 통해 파졸리니가 사망한 당시 상황을 증언했고 새로운 용의자도 추론되었지만 세월이 지나 증거 부족 및 용의자 일부가 이미 사망하여 재조사는 흐지부지 되었다. 혼돈기인 70년대 [[납의 시대]], 우익 [[마피아]] 세력에게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당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22년 이탈리아에서 새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네오 파시스트]] 계열 마피아 조직 '반다 델라 말리아나'가 파졸리니 암살의 배후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